도도 헤이스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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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도도 헤이스케는 1844년 에도에서 태어나 신선조에서 활동하다가 1867년 아부라노코지 사건에서 사망한 인물이다. 그는 지바 슈사쿠의 북진일도류를 수련하고, 곤도 이사미의 시위관에서 식객으로 지내며 신선조에 합류했다. 신선조에서는 부장 조킨, 8번대 대장 등을 역임했으며, 이케다야 사건에서 부상을 입기도 했다. 이후 이토 가시타로 일파와 함께 고료에지를 결성하여 신선조를 떠났으나, 아부라노코지 사건에서 신선조에게 암살당했다. 그는 신선조 사천왕 중 한 명으로 평가받으며, 다양한 소설, 만화, 게임 등 대중 매체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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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도 헤이스케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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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본명 | 도도 헤이스케 후지와라 노 요시토라 |
이명 | 가이 선생 (별명) 남부 요시치로 (변명) |
출생 | 1844년 |
출생지 | 무사시국 에도 |
사망 | 1867년 12월 13일 |
사망 장소 | 아부라노코지, 교토 |
묘소 | 가이코지, 교토 |
신상 정보 | |
씨족 | 도도 씨 |
부모 | 아버지: 도도 헤이노조 또는 도도 다카유키(이세쓰번 번주) 또는 도도 하치자(이세 히사이 번 가로) (속설) 어머니: 도도 헤이노조의 측실 |
경력 | |
소속 | 로시구미(전) 미부 로시구미(전) 신센구미(전) 고료 에지 |
복무 기간 | 1863년–1867년 |
지휘 | 신센구미 8번대 |
전투 | |
주요 전투 | 이케다야 사건 아부라노코지 사건 |
2. 생애
도도 헤이스케는 무사시국 에도(현재의 도쿄도) 출신으로, 쓰 도메인의 11대 영주인 도도 다카유키의 사생아라는 설이 있으나 논란의 여지가 있다. 지바 슈사쿠 나리마사의 도장에서 호쿠신 잇토류를 수련하고, 1862년경 곤도 이사미의 시에이칸에 합류했다.[1]
1863년 로시구미를 거쳐 신선조 결성에 참여하여 부장 조킨(부지휘관)을 맡았고, 1864년 이케다야 사건에서 이마에 부상을 입었다.[2] 1865년에는 제8부대 대장이 되었다.
이후 이토 카시타로의 분파인 御陵衛士|고료 에지일본어에 합류하여 신선조를 떠났으며, 1867년 아부라노코지 사건에서 신선조의 매복에 걸려 사망했다. 나가쿠라 신파치의 《신선조 전말기》에 따르면, 곤도 이사미는 도도의 목숨을 살려주고 싶어 했으나, 신참 대원 미우라 츠네사부로에게 살해당했다.
2. 1. 출신
도도는 무사시국 에도(현재의 도쿄도) 출신으로 보인다.[9] 그의 출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헤이스케의 출신에 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궁내 공문서관 소장의 『유신 계제 잡지』 14권 "신선조 이름" 명부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 에도 출신 도도 요시츠라(도도 헤이노조)의 첩의 자식, 후계자 도도 헤이스케 십구세
이에 따르면, 대신 하타모토 5,000석의 도도가 출신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나가쿠라 신파치의 『동지 연명기』나 교토 재류 당시의 풍문서에 따르면, 쓰 번 번사 나바리 도도가(도도 궁내가), 도도 다카토라의 양자, 니와 나가히데의 삼남 도도 다카요시를 시조로 하여, 이세 쓰 번의 도도 가문 일문 가신(대대로 궁내)으로서 에도의 쓰 번 시모야시키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진다. 일문 가문에서는 대신 하타모토 수천 석의 자도 있었다고 한다. 또한 도도 다카요시의 서자라는 설도 있으며, 이세 히사이가 번 가로 도도 야쿠라의 자식이라는 속설도 있다.
그는 쓰 도메인의 11대 영주인 도도 다카유키의 사생아라고 전해지지만, 이는 매우 논쟁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이 설을 옹호하는 일부에서 제시하는 근거는 그가 쓰 도메인의 후원을 받던 검장이었던 ''가즈사노스케'' 가네시게가 만든 검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검은 단순한 낭인이 상속받는 것조차도 얻기 어려웠을 것이다. 또 다른 점은 그의 정식 이름(諱|이름|요시토라일본어)가 쓰의 초대 도도 영주인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도도 다카토라일본어의 이름과 한 글자를 공유한다는 것이다.
통칭 "헤이스케"[10]는 도도 가문 공신의 이름을 이은 것이라고 전해진다.
2. 2. 북진일도류 수련
도도는 무사시국 에도(현재의 도쿄도) 출신이다. 쓰 도메인의 11대 영주인 도도 다카유키의 사생아라는 설이 있지만, 논쟁의 여지가 있다. 이 설을 옹호하는 측에서는 그가 쓰 도메인의 후원을 받던 검장 가즈사노스케 가네시게가 만든 검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점을 근거로 제시한다. 이러한 검은 단순한 낭인이 얻기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그의 정식 이름(諱|이름일본어)인 요시토라(Yoshitora)가 쓰의 초대 도도 영주인 도도 다카토라와 한 글자를 공유한다는 점도 근거로 제시된다.도도는 지바 슈사쿠 나리마사의 도장에서 북진일도류를 수련했다. 하지만 일부 자료에서는 이토 카시타로의 도장에서 훈련받았다고도 한다. 1862년경, 그는 곤도 이사미의 시에이칸에서 "식사를 시작"했다.[11][12] 북진일도류의 개조 지바 슈사쿠의 도장 겐부칸(간다 오타마가이케)의 문하생이 되어 10대 중반에 북진일도류 목록(중목록 면허로 추정)을 취득했다.
그 후, 후카가와 나카가와초에 있던 북진일도류 이토 오쿠라(이토 카시타로)의 이토 도장에도 출입했고,[13] 나중에 천연리심류 곤도 이사미의 도장 시위관에 입문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대(代)稽古 등을 맡게 되었다.
2. 3. 신센구미 시대
1863년 도도는 곤도 이사미를 비롯한 시에이칸 동료들과 함께 로시구미에 들어갔다. 신선조가 만들어진 후, 도도는 부장 조킨(부지휘관)이 되었다.[1] 그는 신선조에서 가장 어린 대원이었다.세리자와 가모 (신선조의 초대 지휘관 중 한 명) 암살에 도도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자료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1864년 7월 8일 이케다야 사건에서 도도는 이마에 상처를 입었다.[2] 1865년에는 제8부대 대장이 되었다.

『신선조 전말기』에 따르면 헤이스케는 신선조가 결성되기 이전부터 핵심 동료였으며, 사이토 하지메와 함께 가장 어린 간부 중 한 명이었다고 한다.
도도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부장 보좌", "8번대 조장" 등 중요한 자리를 맡았다.
2. 3. 1. 주요 활동
1863년, 도도는 곤도 이사미 및 시에이칸의 다른 멤버들과 함께 로시구미에 합류했다. 신선조가 결성된 후, 도도는 처음에는 부장 조킨(부지휘관)이 되었다.[1] 도도는 신선조의 가장 어린 대장이었다.세리자와 가모 (신선조의 초대 지휘관 중 한 명) 암살에 대한 도도의 역할은 출처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1864년 7월 8일 이케다야 사건에서 이마에 부상을 입었다.[2] 이후 1865년에 제8부대 대장이 되었다.
『신선조 전말기』에 따르면 헤이스케는 신선조 결성 이전부터의 핵심 동료였으며, 사이토 하지메와 함께 최연소 간부 중 한 명이다.
재대 중, 연소자이면서도 "부장 보좌", "8번대 조장" 등 중요한 직책을 역임했다.
분큐 3년 4월 16일 (1863년 6월 2일), 아이즈번 저택에서 교토 수호직마쓰다이라 가타모리 어전 시합이 열렸고, 미부 로시조 전원이 무술을 선보였다. 이 어전 시합의 검술 부문에서 헤이스케는 히지카타 도시조와 첫 번째 시합에서 검을 맞대었다. 두 번째 시합은 나가쿠라 신파치와 사이토, 세 번째 시합은 히라야마 고로와 사에키 마타사부로, 마지막 네 번째 시합은 야마나미 게이스케와 오키타 소지의 대결로 진행되었다. 각 시합의 승패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14]

겐지 원년 6월 5일(1864년 7월 8일) 이케다야 사건에서는, 최초로 쳐들어간 4명 중 한 명으로, 1층 정원을 담당하여 도망치려는 낭사들을 상대로 분전한 결과, 허리에 찬 칼인 가즈사노스케 가네시게는 너덜너덜해졌고, 칼자루 부근에는 수리가 불가능할 정도의 금이 갔다.
전투 중 실내가 너무 더웠기 때문에 땀을 닦으려고 핫킨(鉢金, 두건)을 벗으려던 찰나, 숨어 있던 낭사에게 찔려 이마(미간에서 얼굴 옆면이라고도 함)가 찢어져 기절했다. 한때 생사를 넘나드는 위독 상태에 빠졌다.
사건 후, 곤도, 히지카타 다음으로 이마 부상에 대한 보상금으로 20냥(금 10냥 및 새 칼 구입비로 별도 10냥)을 에도 막부로부터 하사받았다.
겐지 원년 11월(1864년 12월), 신선조는 에도에서 대규모 대원 모집을 실시했는데, 헤이스케는 이에 앞서 지원자를 모집하기 위해 히지카타, 사이토 등과 함께 에도로 향했고, 새롭게 가맹한 이토 가시타로 일파 등을 이끌고 다음 해 5월경에 교토로 돌아왔다.
2. 4. 고료에지 시대
도도 헤이스케는 이토 가시타로의 분파인 고료 에지|御陵衛士일본어에 합류하여 신선조를 떠났다. 이후, 1867년 12월 13일 교토 아부라노코지 사건 당시 신선조의 매복에 걸려 핫토리 타케오 및 모나이 아리노스케와 함께 사망했다.[19] 그들의 시신은 3일 동안 방치되었다가 교토 고엔지에 처음 매장되었고, 이후 교토 가이코지로 옮겨져 안치되었다.나가쿠라 신파치의 《신선조 전말기》에 따르면, 곤도 이사미는 도도의 목숨을 살려주고 싶어 했다. 그러나 도도는 상황을 알지 못했던 신참 미우라 츠네사부로에게 살해당했다.


2. 4. 1. 주요 활동
게이오 3년 3월(1867년 4월), 이토 가시타로 일파와 함께 고료 에지(고다이지당)를 결성하기 위해 신선조를 이탈했다. 이로써 처음 상경했을 때의 목적이었던 존왕양이 지사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하게 된다.고료 에이지 시대의 주요 활동으로는,
- 미노에 출장하여[19], 미노 지역의 협객미즈노 야타로[20]를 설득하여, 미즈노 휘하의 농병 수백 명을 조직해 기병대와 같은 대군을 만들 계획을 세우고, 금전적인 지원도 약속받았다.
- 이토, 사이토 하지메, 스즈키 미키사부로 등과 함께 조슈에 대한 관대한 처분을 요구하는 건백서를 조정과 막부에 제출했다.
등이 있다.
곤도 이사미는 고료 에이지 측에 간자로 잠입해 있던 사이토로부터 이러한 보고를 받고 격노하여, 고료 에이지를 섬멸할 것을 결의했다고 한다[21]。
또한, 고료 에이지들은 영어 학습이나 로켓 제조 방법과 같은 화약 연구 등에 힘썼다.
시노하라 야스노신의 각서에는 "굿 나이트(Good night) '곤방하'", "기브 미(Give me) '와타시니 쿠다사레(私に被下)'", "생큐(Thank you) '아리가토(難有)'", "아이 러브 유(I love you) '와타시 아나타오 스키데스(私あなたをすきです)'" 와 같은 내용이 있으며, 헤이스케도 학문에 힘썼던 것으로 보인다.
1867년 8월 23일, 에가와 숙소·니라야마 숙소(에가와 가문의 포술 지도 사숙)에서 포술 면허를 받았다.
니라야마의 에가와 문고에 있는 문인 명부 '어숙부'에는 "게이오 3년 정묘년 8월 23일 면허 (중략) 마츠다이라 히고노카미 부속 신선조 도도 헤이스케"라는 기록이 있다.

게이오 3년 11월 15일[22](1867년 12월 10일), 이토는 헤이스케를 데리고 당시 사카모토 료마가 머물고 있던 오미야를 방문하여 시세에 대해 논의했다.
견회조 등이 사카모토를 암살하려 하니 속히 토사번 저택으로 옮기라고 충고했지만, 사카모토는 충고에 감사하다는 뜻만 표할 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고 한다[23]。
이토는 "자신이 신선조에 있었기 때문에 신용을 얻지 못해 유감이다"라고 한탄했다고 한다[24]。
이토 등의 충고는 소용없이, 얼마 지나지 않아 사카모토는 나카오카 신타로와 함께 암살당하고 만다(오미야 사건).
2. 5. 아부라노코지 사건
도도는 이토 가시타로의 분파인 고료 에지|御陵衛士일본어에 합류하여 신선조를 떠났다. 이후, 먼저 살해된 이토의 시신을 수습하려다가 6명의 탈주병들과 함께 1867년 12월 13일 교토 아부라노코지 사건 당시 신선조의 매복에 걸려 핫토리 다케오 및 모나이 아리노스케와 함께 사망했다.[25] 그들의 시신은 3일 동안 방치되었다가 교토 코엔지에 처음 매장되었다. 이후, 교토 카이코지로 옮겨져 안치되었다.나가쿠라 신파치의 《신선조 전말기》에 따르면, 콘도는 도도의 목숨을 살려주고 싶어 했다. 그러나 도도는 상황을 알지 못했던 신참 미우라 쓰네사부로에게 살해당했다.[28][29]

게이오 3년 11월 18일(1867년 12월 13일) 밤, 신선조에 의한 이토 암살 및 고료 에지 섬멸을 목적으로 한 대규모 숙청이 단행되었다 (아부라노코지 사건).
아부라노코지에서 신선조에게 암살당한 이토의 유체를 탈환하기 위해, 함정임을 알면서도 헤이스케는 동지 7명과 함께 현장으로 향한다. 매복하고 있던 40명 이상의 신선조 대원들과 사투 끝에, 다음 날 11월 19일(12월 14일) 미명에 전사했다.[25]
검시 결과에 따르면, 이마에서 코에 걸친 상처는 길이 약 21cm, 깊이 6cm에 달해 거의 즉사했다고 한다.[26] 헤이스케 등 4명의 유해는 고료 에지 잔당을 유인하기 위한 미끼로 며칠(3, 4일 정도) 동안 길가에 방치되었다.[27]
나가쿠라에 따르면, 콘도에게서 "(도도는) 아직 젊고 유능한 인재이므로 가능한 한 돕고 싶다"는 지시가 있어 헤이스케가 도망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었지만, 사정을 모르는 대원 미우라 쓰네사부로[28]에게 베였다고 한다.[29]
또한, 헤이스케는 나가쿠라의 심중을 헤아렸지만, 사키가케 선생님이라고 불린 프라이드와 동지를 버릴 수 없어서, 신선조에게 맞서 싸우다 미우라에게 베였다고도 한다.[30]
3. 인물됨
도도 헤이스케는 신선조 대원으로서 짧은 기간 동안 활동했지만,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질 정도로 유명했다. 그러나 그의 생애는 짧았기 때문에, 인물됨이나 행적에 대한 자료나 구전은 매우 적게 남아있다.
몇 안 되는 사료와 증언을 바탕으로 도도 헤이스케의 인물됨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뛰어난 미모: 사쓰마 번 가신의 기록에 따르면, 도도 헤이스케는 도도 이즈미노카미의 첩의 자식이라는 소문이 있었고, 매우 뛰어난 미남이었다고 한다.[34] 실제 나이보다 어려 보이는 동안이었다는 기록도 있다.
- 작은 체구: 아베 주로의 증언에 따르면, 도도 헤이스케는 키가 작았다고 한다.[35] 당시 성인 남성의 평균 신장이 155~157cm 정도였던 것을 고려하면,[36] 헤이스케의 신장은 153cm 전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자신의 키 절반 정도 길이의 일본도를 자유자재로 다루었다는 점이 놀랍다.
- 문무 겸비: 나가쿠라 신파치는 도도 헤이스케가 지바 슈사쿠의 제자로, 검술 실력이 뛰어났다고 증언했다.[37] 아베 주로는 검술뿐만 아니라 학문에도 능했다고 평가했다.[38] 고야마 마사타케는 지략과 용기를 겸비한 인물이었다고 칭찬했다.[39]
- 뛰어난 경제 감각: 니시무라 카네후미는 도도 헤이스케가 경제에 능숙했다고 증언했다.[40]
- 품행 문제: 유우키 무니조는 도도 헤이스케가 품행 문제로 곤도 이사미에게 자주 꾸중을 들었다고 주장했다.[41] 그러나 이 주장은 유우키 무니조의 선입견이나 상상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고모자와 칸의 저서에도 "품행은 불량했지만 인물이 확실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증언자나 출처는 불분명하다.
- 당당한 행동: 이시자카 슈조는 도도 헤이스케를 히지카타 토시조와 함께 "악당"이라고 평가하며, 매우 반항적이고 눈에 띄는 인물이었다고 회고했다.[42]
- 용맹하고 활발한 성격: 사쓰마 번 가신은 도도 헤이스케를 "대내 최고의 혈기 왕성한 대원"이라고 평가했다.[44] 또한, 전투 시 항상 선두에 섰기 때문에 '카이 선생님'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고 한다.[45]
- 여성 관계: 미남으로 알려졌음에도 불구하고, 도도 헤이스케에게는 여성 관련 일화가 거의 남아있지 않다. 기온 제일의 미모를 자랑했던 게이샤 나카니시 기미오의 증언이 있지만, 시기상 맞지 않아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다.
- 신선조 사천왕: 오키타 소지, 나가쿠라 신파치, 사이토 하지메와 함께 "신선조 사천왕" 또는 "곤도 사천왕"으로 불렸으며, 어릉위사 시대에는 "이토 가시타로의 좌우의 손"으로 칭해졌다.[46]
4. 평가 및 논란
; 문무를 겸비함
; 뛰어난 경제 감각
; 품행에 관한 문제점
- 유우키 무니조일본어의 증언[41]
- : "……곤도와 가장 오래된 관계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품행 문제로 시종 곤도에게 꾸중을 듣고, 특히 요즘은 완전히 소외되어 버린 듯한 도도 헤이스케……"
자칭 신선조 대원인 유우키 무니조의 아들인 유우키 레이이치로의 저서 『구막 신선조의 유우키 무니조』가 출처이지만, 이 책은 사실 오류나 사료와 다른 정보가 자주 지적되고 있어, 유우키의 선입견 또는 상상일 가능성도 부정할 수 없다.
또한, 고모자와 칸의 저서 『신선조 시말기』에도 "에도 사나이로 품행은 불량했지만 인물이 확실했다"는 기술이 있지만, 증언자나 출처는 불명이다.
; 당당한 행동
- 이시자카 슈조일본어의 증언[42]
- : "……과연 대원 중에도 히지카타 토시조나 도도 헤이스케 같은 악당이 있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이시자카 슈조는 낭사대 상경 당시의 조두를 맡았던 주요 간부이다. 300명이 넘는 낭사대 중에서 굳이 히지카타와 헤이스케를 지명하는 것을 보면, 그들이 매우 반항적이고 눈에 띄었거나, 어쨌든 이시자카는 두 사람을 "만만치 않은 낭사"였다고 회고하고 있다[43]。
; 용맹하고 활발한 성격
5.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 미나미하라 미키오의 소설 《신선조 정부전》에 수록된 〈피로 물든 유젠 도도 헤이스케의 여자〉는 단편 소설로, 부대를 떠난 헤이스케를 걱정하는 소꿉친구 여성에게 히지카타 토시조가 어떤 의뢰를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47]
- 사오토메 코우의 소설 《신선조 명명전》에 수록된 〈어린 혈통이 통과한다〉는 단편 소설로, 헤이스케가 가난한 맹인 부부에게 길러진 사생아라는 설정을 다룬다.
- 카자마키 겐이치의 소설 《구덴류 검사 신선조 도도 헤이스케》는 장편 소설로, 신선조보다 고료에이지 측에 마음을 두는 헤이스케를 그린 몇 안 되는 작품이다.
- 히사카 마사시의 소설 《신선조 마도검》에 수록된 〈기온의 여자〉는 단편 소설로, 헤이스케가 야스이 곤피라 궁에서 인연 끊기 기도를 하던 게이샤와 친해지지만, 점차 여자의 과도한 사랑이 부담스러워지는 이야기를 다룬다.
- 아키야마 카노의 소설 《신선조 도도 헤이스케》는 장편 소설로, 헤이스케와 히지카타의 만남부터 아부라코지 사건까지의 반생을 면밀하게 그린다.[47]
- 아키야마 카노의 소설 《토시조, 가고 또 가다》는 《신선조 도도 헤이스케》의 속편인 장편 소설이다. 주인공은 히지카타로 바뀌었지만, 헤이스케의 존재감이 강하게 나타난다.
- 하가네 미야아키의 소설 《아사기색의 일상》에 수록된 〈지킬 수 없는 약속〉은 단편 소설로, 신선조에 어울리지 않는 대사를 돕고 싶어 하는 헤이스케의 이야기를 다룬다.
- 하가네 미야아키의 소설 《오하시 할머니의 짚인형》에 수록된 〈도도 헤이스케라는 남자〉, 〈상처〉는 단편 소설로, 이케다야 사건에서 부상당한 헤이스케가 중심이 되는 이야기이다.
- 마츠모토 마사요의 소설 《독백 신선조》에 수록된 〈제11장 게이오 3년 11월〉은 단편 소설(트위터 소설)로, 시치조 아부라코지에서 전사한 직후, 영혼이 된 헤이스케가 자신의 시체를 보면서 중얼거리는 내용을 담고 있다.
- 역사 시대 작가 클럽의 소설 《신선조 출진》에 수록된 아키야마 카노의 〈성의 깃발 아래에서〉는 단편 소설로, 초심을 관철하기 위해 신선조를 떠나는 헤이스케의 심경과 친구에 대한 마음을 그린다.
- 아마노 즈키의 소설 《보신 료란》은 장편 소설로, 주인공 야마우라 테츠시로의 친구로서 헤이스케가 많이 등장한다.
- 야마무라 타츠야, 니나가와 야에코의 만화 《신선조 인의초 아사기》는 오키타 소지, 도도, 사이토 하지메의 동년배 3인조의 시점에서 신선조의 청춘을 그린다.
- 오가키 로크로의 만화 《시노비노》에서 헤이스케는 주요 인물 중 한 명으로, 주인공 진사부로의 제자이자 닌자로서 수행을 쌓고, 곤도 이사미 등 시위관 사람들과 만난다.
- 토노가야 미유키의 만화 《단다라 밥》에서 헤이스케는 주요 인물 중 한 명으로, 시위관의 식객이다. 주인공 사이토 하지메, 오키타 소지와 함께 작가에게 '19세 조'로 불리며, 하라다 사노스케나 나가쿠라 신파치 등 시위관 사람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 바람의 검심 -메이지 검객 낭만담- 본편 및 홋카이도 편에서 히무라 켄신과 나가쿠라 신파치의 회상으로 등장하며, 다른 대원들보다 어린 미소년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 NUMBER8, 바쿠 쿠조의 만화 《ABURA》는 아부라코지 사건을 소재로 한 작품으로, 도도가 주요 인물 중 한 명으로 등장한다.
- 오토메이트의 게임 《박앵귀 시리즈》에 등장한다.
- 제노 스튜디오의 애니메이션 《붓치기레!》에 등장한다.
- 뮤지컬 '박앵귀' ~도도 헤이스케 편~이 상연되었다.
- 용과 같이 유신!에서 다이토 슌스케가 도도 헤이스케 역을 맡았다.
- 용과 같이 유신! 극에서 오카모토 노부히코가 도도 헤이스케 역을 맡았다.
- 류센 쇼시의 저서 《신선조 검호 비화》(1973)
- 이치이 코이치의 저서 《고다이지 당의 사람들》(1977, 2004년에 재수록)
- 야마무라 타츠야의 저서 《신선조 검객전》수록 「선구의 검, 토도 헤이스케」(1998, 2002년)
- 신진물왕래사 편 《신선조 명명전》수록 「제1권 토도 헤이스케」(2003년)
- 마츠우라 레이의 저서 《신선조》(2003년)
- 키쿠치 아키라, 이토 나리로우, 유우키 시하야의 저서 《히지카타 토시조와 신선조 10명의 조장》수록 「8번조 조장 토도 헤이스케」(2012년)
- 나가쿠라 신파치의 저서 《낭사 분큐 보국 기사》(2013년)
- 히호의 저서 《토도 헤이스케는 무엇인가-낙인의 남자라고 불린 남자》(2014년)
참조
[1]
서적
Shinsengumi Kenkyaku-Den
PHP Kenkyūjo
1998
[2]
서적
Shinsengumi Kenkyaku-Den
PHP Kenkyūjo
1998
[3]
문서
正確には慶応3年[[11月19日 (旧暦)|11月19日]](1867年[[12月14日]])未明
[4]
문서
生誕日によっては満22歳没
[5]
문서
『維新階梯雑誌』(宮内公文書館蔵)の本文では「平之丞」と記載
[6]
문서
[[藤堂高猷]]([[伊勢国|伊勢]][[津藩]]主)もしくは[[藤堂八座]](伊勢[[久居藩]]家老)等の俗説あり
[7]
문서
『維新階梯雑誌』に「平之丞妾」とある
[8]
문서
「宜寅」「良全」の表記もある
[9]
문서
江戸生まれとの説もある
[10]
문서
「平」の字は、藤堂平助の先祖、丹羽長秀の五男・高吉が、藤堂高虎の養子となる、高吉の子孫が藤堂本家と津藩藤堂本家から独立して離叛し家臣3名が[[切腹]]する事件がおこり(享保騒動、名張騒動)以降に同じことが起きないようにと戒めのために名張藤堂家(藤堂宮内家)の当主やその一門が名乗ることと定められた。
[11]
서적
『同志連名記』永倉新八著、『新選組遺聞』(谷三十郎の証言)子母澤寛著
[12]
문서
但し『玄武館出席大概』[[清河八郎]]著(千葉道場に在籍したとみられる門弟の名簿)に平助の名は記されていない
[13]
문서
「藤堂は伊東甲子太郎の伊東道場の寄り弟子」という[[加納鷲雄]]の証言より
[14]
문서
土方の日記より
[15]
문서
この金子をなかなか受け取らなかったという説がある
[16]
뉴스
新選組の忘れ物 キセル入れ見つかる 草津宿本陣 滋賀
https://www3.nhk.or.[...]
NHK
[17]
문서
「9月初旬、藤堂が伊東大蔵(甲子太郎)の道場へ入隊の勧誘に来た」との加納鷲雄の証言より
[18]
문서
池田屋での大怪我の治癒もかねた東帰であったとの説もある
[19]
문서
「藤堂平助、先日頃より美濃国へ罷越しおり候得共」『鳥取藩記録』より
[20]
문서
永倉新八『同志連名記』によると水野はかつて新選組に出入りしていたとされる
[21]
서적
『新撰組始末記』西村兼文著
[22]
문서
11月13日ともいわれる(『新選組始末記』子母澤寛著)
[23]
문서
中岡慎太郎は忠告を喜んだが、坂本は不遜な態度で礼も述べなかったともいわれる(『新選組始末記』子母澤寛著)
[24]
서적
『新撰組始末記』西村兼文著、『維新風雲回顧録』田中光顕著
[25]
문서
ただし生きていた可能性もある。詳細は後述の生存説の項を参照。
[26]
문서
『鳥取藩慶応丁卯筆記』
[27]
서적
『新撰組始末記』西村兼文著、『新選組始末記』子母澤寛著他
[28]
문서
江戸府内浪人で平助から多大な恩を受けた隊士(『新選組始末記』子母澤寛著)。事件後、平助に斬られた膝の傷が原因で死亡した(『浪士文久報国記事』永倉新八著)。
[29]
서적
『新撰組顛末記』永倉新八著
[30]
서적
『新選組始末記』子母澤寛著
[31]
문서
数え年
[32]
서적
『近世殉国一人一首伝』城兼文編
[33]
간행물
油小路の藤堂平助
秋田書店
1980-11
[34]
문서
『京師騒動見聞雑記録』
[35]
문서
『史談会速記録』
[36]
CRD
江戸時代の男女の平均身長はどれくらいか。
東京都江戸東京博物館 図書室
[37]
서적
同志連名記
[38]
서적
史談会速記録
[39]
서적
史談会速記録
[40]
서적
近世殉国一人一首伝
[41]
서적
旧幕新撰組の結城無二三
[42]
서적
史談会速記録
[43]
문서
[44]
서적
京師騒動見聞雑記録
[45]
서적
京師騒動見聞雑記録
[46]
인용
[47]
서적
SAMURAI 裏切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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